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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거니는 여행기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거니는 여행기





1. 성(城)의 공간이 아닌 시간을 들여다보다 


여행은 현재의 것이고, 여행기는 현재의 기록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여행기라는 흥미진진한 단어 속에는 지금 이 순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일상, 풍경, 즐거움같은 것들이 함축적으로 녹아들어 있다. 우리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에 서점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여행기들을 통해 상상 속의 여행자가 되어 바다 건너 미지의 타국 땅을 간접적으로 밟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행기들은 스튜디오에서 찍는 웨딩사진처럼 배경만 이리저리 바뀔뿐, 그 안에 투영된 본질 혹은 욕망은 비슷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평범함의 사막 속에도 비범함의 오아시스가 있기 마련이다. 

단 하나의 오아시스 때문에 우리는 사막을 100% 모래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이런 비범한 글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글들이 특별해지는 것이 아닐까. 


작가는 성(城)이라는 테마를 단순히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성이 완성되기까지의 역사, 그리고 성에서 이루어진 수 많은 문학과 예술작품과 연결시키면서, 성이라는 공간에 역사와 시간, 예술이라는 생명력을 부어넣고 있다. 책은 성(城)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통해 그 안의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2. 여행에 대한 철학적 사유 


특히나 이 책의 백미(白眉)는 책머리와 마지막에 있다. 

여행의 의미를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를 통해 인생과 연결시키는 두 부분의 문장들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독립된 문학작품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이 문장들이야말로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는 말들이다. 


저자는 여행이란 단순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낮섦과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여행지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여행지 위에 서 있는 내 삶이고, 여행이란 내 삶과 낮선 공간이 마주치는 순간 순간들인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책은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자유롭게 오고가며 성이 지닌 깊은 시간 속으로 잠수해 들어간다. 우리는 책 속의 글을 통해 성이라는 결과물을 쌓기까지 지나온 시간의 단층들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3. 역사적, 문학적 배경지식이 필요한 여행기


이 책은 '마담 보바리'부터 '아웃 오브 아프리카'까지 문화 예술의 다양한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고 있다. 

물론 그와 관련된 배경지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책을 즐기는 것에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관련된 배경지식이 필요해 보인다. 


여행기라면 보통, 책을 덮고 나서 그 곳에 가보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책을 덮고 나면 책 속에 소개된 작품이 보고 싶어진다. 책 속의 여행지가 아니라 지금 당장 어딘가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여행은 이처럼 영혼에 치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