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책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문명의 허울에 대한 씁쓸한 우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문명의 허울에 대한 씁쓸한 우화





1. 로빈슨 크루소의 재해석


영국의 작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모험담처럼 기억되고 있다. 

무려 300여 년전(1719년)에 발표된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공에 홀로 조난당한 주인공의 모험담이기도 하지만, 그 내면에는 영국식 패권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문명화되지 않은 야생을 상징하는 무인도와 프라이데이를 대상으로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가 자신의 문명을 전파하는 과정을 그린다고 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영국식(혹은 그 때 당시의 유럽식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식민지배 과정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식민지 시대는 끝이 났고, 시대와 함께 영원할 것 같던 식민지 시대의 패권주의도 끝이 났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식민지 시대의 신화이자 우화, 혹은 축소된 모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1967년,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이 등장하게 된다. 



2. 고독의 지독한 내면


사실 이 소설은 초중반부까지는 이전의 '로빈슨 크루소'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다만 몇가지 다른 점이 존재하는데, 전체 이야기를 암시하는 듯한 타로 점괘가 초반에 등장한다는 점과 (주인공의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 타로 카드점이라는 점은 지극히 미신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상징으로 느껴진다) 무인도에 표류한 이후 주인공의 심경 변화의 부분이다. 


주인공이 최초의 탈출시도 이후 정신적인 붕괴 상태를 거치게 되는데, 이 이후에 등장하는 항해일지 부분은 지독할 정도로 치밀하게 한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고 있다. 주인공은 겉으로 보기에는 땅을 개간하고 법령을 발표하고, 시간과 도량형의 체계를 빈틈없이 만들어나가는 개척자의 모습이지만, 항해일지에 등장한 내면에서는 끝없는 고독과 허무주의에 매몰되어 고통받고 두려워하는 인간 내면의 맨얼굴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설령, 이 소설에서 무인도의 표류와 모험에 대한 부분을 거세해버린다고 해도, 고독 속에 남겨진 내면에 대한 탐구만으로도 이 책은 여전히 가치있는 작품일 것이다. 



3. 방드르디, 문명의 충돌


방드르디는 프랑스어로 금요일(프라이데이)란 뜻이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주인공이 식인종의 무리에서 구출한 원주민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데, 이 책에서는 비슷한 인물로 '방드르디'가 등장한다. 사실, 방드르디가 등장한 이후까지도 기존 '로빈슨 크루소'의 외형적 이야기 줄기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의 가르침과 지배에 따라 방드르디는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한 흑인 하인의 모습을 매우 충실하게 수행한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방드르디의 내면은 노예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겉으로는 문명인이자 지배자이지만, 내면은 고독한 인간일 뿐인 로빈슨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순종적인 모습과는 달리 방드르디는 자유분방함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로빈슨을 시험에 들게 한다. 마치, 서구 문명과 원주민의 문명이 처음 마주치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온갖 무기와 의복으로 치장한, 화려해보이는 서구 문명도 그 내면은 텅 비어있을 뿐이라는 것을 로빈슨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무기도 옷도 없지만 자연 속에서 무한히 자유로운 방드르디는 서구 문명이 가지지 못했던 균형과 조화를 통해 단단한 내면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4. 지상에서 바람으로, 인간에서 자연으로


이러한 두 문명은 극적인 사건을 통해 전복된다. 

방드르디의 실수로 인해 지금껏 로빈슨이 쌓아두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게 되고, 체계와 지배에 의해 유지되던 섬이라는 세상은 다시 원초적인 수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여기서부터가 대디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달라지는 지점인데, 이러한 변화로 인해 드디어 소설은 자신의 주제의식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기 시작한다. 


로빈슨은 자신이 이루어놓은 모든 것들이 사라진 순간,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이룩해 놓은, 그러나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었던 문명의 수레바퀴가 멈추어 버린 것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방드르디의 세계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원주민의 문화가 서구의 문명보다 더욱 뛰어나거나 앞선 것이 아니며, 사실 세상 모든 문화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내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 앙도아르이다. 

야생의 숫염소인 앙도아르는 방드르디와 목숨을 건 격투끝에 죽게 되고, 방드르디는 그 염소의 가죽으로 하늘을 나는 연을, 머리 뼈로는 바람을 타는 악기를 만들게 된다. 책 속 로빈슨의 자기 고백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앙도아르는 로빈슨을 상징한다. 공격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던 앙도아르가 방드르디에 의해 연과 악기로 변한 것처럼, 로빈슨도 죽음(말하자면, 서구 문명의 내적 죽움)과도 같은 과정을 거쳐 지상에서 벗어나 바람 속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된 것이다. 



5.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섬이 지니는 상징성은 단순히 바다 가운데 있는 육지에 그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절대 고독의 공간이자,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빈 캔버스 같은 땅. 하지만 들여다보면, 절묘한 자연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작은 우주. 섬이라는 공간은 이처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등장하는 섬, 스페란차는 고독의 섬이자 연결의 섬이다. 방드르디에서 로빈슨으로 이어진 섬의 철학은 죄디로 이어지는 결말을 통해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이 드러낸다. 그것은 누군가를 고독 속에서 구해주는 것,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