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
- 따라서 수사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설득과 관계가 있으며, 설득은 증명의 일종이다(무엇이 증명되었다고 믿을 때 가장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 말로 제시하는 증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것은 말하는 사람의 성격에 달려 있고, 두 번째 것은 청중이 어떤 심적 상태에 있게 하느냐에 달려 있고, 세 번째 것은 말이 증명하거나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는 말 그 자체에 달려 있다.
- 몇몇 수사학 전문가가 주장하듯, 말하는 사람이 드러내는 개인적 정직성은 그의 설득력에 젼혀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성격은 말하는 사람이 지닌 가장 효과적인 설득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행복을 미덕과 결합된 안녕, 자족적인 삶, 가장 즐겁고 안전한 삶,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번영에 그런 것들을 지키고 이용할 능력을 곁들인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미덕은 악덕이 아닌 것보다 더 중요하고, 악덕은 미덕이 아닌 것보다 더 중요하다. 미덕과 악덕은 목표이고, 악덕이 아닌 것과 미덕이 아닌 것은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칭찬과 권유는 닮은 점이 있다. 누가 조언하며 권유하는 것은 표현 방식을 바꾸면 찬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 알 때는 이런 앎을 권유로 받아들여 거기에 맞게 표현을 바꾸어야 한다.
- 따라서 즐거움은 현재의 것을 지각하는데 있거나, 과거의 것을 기억하는데 있거나, 미래의 것을 기대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것으로 지각할 때 즐거운 것뿐 아니라 즐겁지 않은 것이 기억나더라도 그 결과가 고매하고 좋을 경우에는 역시 즐겁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 살아남은 자에게는 고생스러웠던 일을 회상하는 것도 즐겁다
- 호메로스는 분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분노란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달콤하다 - 우리는 익숙한 것은 즐겁다는데 동의했으니까. 하지만 변화도 즐겁다. 변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같다는 것은 기존 상태를 과도하게 연장하는 것이니까
- 연설가가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 증명과는 별도로 남이 나를 믿도록 만드는 것은 세 가지 즉, 상식, 미덕, 호의이기 때문이다.
- 분노란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달콤해서 인간의 가슴속에서 점점 커지는 법이지요
- 거짓말을 해도 사람들이 곧이 듣는 버릇이 있다면, 그 반대도 그대는 인정해야 하오. 참말을 해도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단 말이오.
- 연설과 관련해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증거의 출처이고, 둘째는 문체이며, 셋째는 연설의 부분들을 적절히 배열하는 일이다.
- 일반적으로 글로 쓴 것은 읽기 쉽고 말하기 쉬워야 하는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 다음에 말할 것들은 문체를 숭고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어떤 사물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정의 내리는 것이다.이를테면 '원'이라 하지 않고 '사방의 모든 점이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평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간결함을 위해서는 정의하는 대신 이름을 써야한다.
<시학> - 비극과 희극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려 한다
- 희극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못났지만 전적으로 악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을 모방한다. 우스꽝스런 것은 추함의 일종이니까. 우스꽝스런 것은 남에게 고통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일종의 실수 또는 기형이다
-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짜임새,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사건과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게다가 행동 없는 비극은 불가능 하겠지만, 성격 없는 비극은 있을 수 있다
- 가장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 하며, 또한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해야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모방의 특징이기 때문이다.)따라서 다음 세 가지 플롯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
- 첫째, 점잖은 사람이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공포의 감정도 연민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불쾌감만 주기 때문이다.
- 못난 자가 불행하다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여서도 안된다. 그것은 가장 비극적인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극의 필요조건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즉 그것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도 없고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 또한 극악한 자가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서도 안된다. 그와 같은 플롯 구성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은 있을지 몰라도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고,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느낀다.) 따라서 이 경우는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들의 중간에 있는 인물이다. 미덕과 정의에서 탁월하지는 않지만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하마르티아 때문에 불행을 당한 사람이 곧 그런 인물인데, 그는 오이디푸스나 튀에스테스나 그와 대등한 가문의 저명인사들처럼 큰 명망과 번영을 누리는 자 가운데 한 사람이어야 한다.
- 모든 비극은 갈등과 그 해결로 이루어진다. 갈등은 드라마 바깥의 사건과 때로는 드라마 안의 사건 가운데 일부를 포함한다. 나머지는 해결이다
- 나는 스토리가 시작되고부터 주인공의 운명이 바뀌기 직전까지를 갈등이라고 부르고,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 때부터 끝가지를 해결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