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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책속에서

<문장론> - 쇼펜하우어

  • 아무리 그 수가 많더라도 제대로 정리해놓지 않으면 장서의 효용가치는 기대할 수 없다. 반대로 그 수는 적더라도 완벽하게 정리해놓은 장서는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많은 지식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해지고, 양적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인 이성을 통해 여러 번 고찰한 결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산이 될 수 있다
  • 사상은 주관적인 논리와 스스로 터득한 지식을 기초로 세워지는 건축물이다
  • 알기 위해서는 물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인간의 정신은 외부로부터 강압적으로 주입되는 강요에 쉽게 굴복될 만큼 나약한 면이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주체적인 사색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같은 주체적인 사상은 감정이라는 발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다독은 인간의 정신에서 탄력을 빼앗는 일종의 자해다. 압력이 너무 높아도 용수철은 탄력을 잃는다
  • 그러므로 학자란 타인이 남긴 책을 모조리 읽어버리는 소비자이며, 사상가란 인류를 계몽하고 새로운 진보를 확신하는 생산자라고 표현할 수 있다
  • 스스로 발견한 사상을 통해 개별적인 진리는 고유한 생명을 획득한다.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사상뿐이다. 책을 통해 경험한 타인의 사상은 타인이 먹다 남기 찌꺼기, 즉 타인이 벗어 던진 헌옷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이 영원한 봄날은 스스로 꽃을 피우고 싶어 한다. 그에 비해 타인의 책을 통해 습득된 사상은 묘비에 글을 새기는 것에 불과하다
  • 이런 자들은 광활한 실제 자연보다 식물도감에 기재된 동판화를 더욱 아름답게 여기는 바보에 불과하다
  •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나만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어떤 진리에 도달했다면, 비록 그 내용이 앞서 다른 책에 기재되었을지라도 타인의 사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점이다.
  • 독서로 삶을 허비하는 것은 여행 안내서를 통해 어떤 지방의 풍속에 정통해지는 여행 안내인의 삶과 다를 바 없다
  • 평범한 서적 철학자와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의 관계는 역사학자와 목격자의 관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
  • 인간은 누구나 쉬운 길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일한 사색도 나의 개인적인 사색보다는 책을 통해 작가의 사색을 좇는 것을 더 좋아한다. 눈앞에 놓인 가시밭길 보다 작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평탄한 길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다. 다독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나친 독서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떨어뜨리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소재는 활기가 넘치고 살아 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사색의 공간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것이다.
  • 이미 수명이 다한 언어에 약간의 유행어를 섞은 서적 철학자들의 문제는 마치 타국의 화폐를 통화로 사용하는 약소국처럼 어딘지 모르게 비애가 느껴진다
  • 영혼에 사상을 품고 살아가는 것과 가슴에 연인을 묻고 살아가는 것은 동일한 현상이다. 우리는 영혼에 새겨진 사상이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결혼이라는 끈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결국 소멸하는 것처럼 위대한 사상도 종이에 써두지 않으면 언젠가 사라지고 만다
  • 저술가에게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사물의 본질을 밝혀내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과, 무언가 쓰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 책의 제목은 편지의 수신인에 해당된다. 책에 제목이 필요한 이유는 책의 내용에 관심을 보일 만한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 저서는 저자의 사상을 복제한 복제품에 불과하다
  • 따라서 인간의 대화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화제가 아니라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형식적인 능력이다. 이와 반대로 형식적인 능력이 결여된 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대화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특정한 소재를 찾게 되는데, 이런 특정한 소재는 대부분 자신이 속한 전문적인 분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상대방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화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 어떤 사항의 생명은 그 사상이 마침내 언어로 부활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사라진다. 언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사상은 화석으로 변모하고, 결국 생명을 잃고 만다. 그러나 화석화된 태고의 동식물을 통해 우리가 생명의 순환을 깨닫듯이 황폐화된 사상을 통해 우리는 정신의 사막화를 두려워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 문체는 정신의 표정이다. 그것은 육체에 갖춰진 표정 이상으로 인격의 개성을 나타낸다
  • 정신의 대표적인 기능은 사물을 직관화하는데 있다
  • 다시 말해 문장이 난해하고 불분명하며 모호하다는 것은 그 문장을 조립한 작가 자신이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응석에 불과하다
  • 이런 문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사상도 중력의 법칙을 따른다는 점부터 명심해야 한다. 사상을 머리로 생각하고 종이에 쓰기는 쉽지만, 종이에 쓰인 것을 머리로 옮기기는 무척 어렵다
  • 무지는 부와 결부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