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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책속에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미셸 투르니에


39p

그는 수평선 위에 오직 자연만이 창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광대하고 더 찬란한 무지개가 솟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무지개라기보다는 오직 아래쪽 반원만을 물결 속으로 감추고 신기할 만큼 싱싱한 색깔로 일곱 가지 빛살을 펼치는 거의 완벽한 후광과도 같았다. 


45p

이리하여 그는 타인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강력한 주의력 전환 요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타인이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력을 방해하고 현재 하고 있는 생각으로부터 딴 곳으로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때문만이 아니라, 타인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당장은 우리들 주의력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언제든 그 중심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희미한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49p

오직 과거만이 중요한 존재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현재는 추억의 샘, 과거의 생산 공장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었다. 죽음은 그 축적된 금광을 향유할 수 있는 순간에만 진정한 죽음이었다. 우리가 소란스러운 현재 속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주의 깊게, 현명하게, 감각적으로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 


76p

황금시대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이해햐야 한다. 만약 인류가 돈으로 매수될 수 있는 인간들에게 의해서만 이끌어졌더라면 재빨리 그에 도달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불행하게도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물욕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모든 것이 불에 파괴되고 피가 물결쳐 흘렀다.


81p

이 물시계는 로빈슨에게 엄청난 위안을 주었다. 그가 밤이건 낮이건 함지 속으로 떨어지는 이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를 들을 때면 시간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두운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규칙화되고 지배되고 장차 섬 전체가 그렇게 되려 하듯이 오직 한 인간의 정신력에 의하여 길들여지게 된다는 자랑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152p

다시 한번 그의 고독은 그 모든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모든 작업의 헛된 면이 문득 마음을 짓누르면서 뻔한 것으로 여겨졌다. 경작은 무용하고 목축은 터무니없고 곡식의 저장은 양식에 대한 모독이요 헛간은 우스개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성채는, 그 헌장은, 그 형법은? 누구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누구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의 작업 하나하나느 그 누군가를 향한, 대답도 없는 부름이었던 것이다. 


181p

내가 그르 구해 준 요일의 이름인 방드르디로 정함으로써 나는 이 난처한 문제를 무리없이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람의 이름도 물건의 이름도 아니다. 그건 두 가지의 중간쯤 되는, 반쯤은 생명이 있고 반쯤은 추상적인 이름으로, 시간적이고 우연적이며 마치 일화적인 것 같은 성격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 


211p

또 방드르디와 동물들 사이의 관계는 내가 내 동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짐승들에게 그들과 같은 무리처럼 받아들여지고 대접받는다. 그가 짐승들에게 보답해 줘야 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는 오직 자기의 육체적인 힘과 우월한 꾀 덕분에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권리를 짐승들에게 아주 순진하게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233p

이제 막 발생한 엄청난 재난은 그 자신이 은근히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사실 잘 다스려놓은 이 섬은 결국 그의 마음에 방드르디 못지않은 부담을 주고 있었다. 방드르디는 자신도 모르게 이 대지의 뿌리를 뽑아놓고 이제 와서는 로빈슨을 저 다른 것 쪽으로 이끌어가려는 것이다. 대지가 지배하는 그 세계에 오직 그에게 고유한 세계를 대치시켜 놓으려는 것이었는데, 로빈슨은 그 세계가 어떤 것이 될지 알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새로운 로빈슨이 그의 낣은 살갗 속에서 꿈틀대면서 이 관리된 섬이 붕괴되는 것을 방치한 채 무책임한 선두를 따라 낯선 길로 들어가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246p

거기에는 땅과 공기가 있었고 그 두 원소 사이에는 나비처럼 떨면서 바위에 달라붙은 로빈슨이 이쪽을 믿을까 저쪽을 믿을까 주저하면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253p

어떤 뜨거운 물결이 그를 휩샀다. 인색한 새벽이 지난 후 저 황갈색의 빛이 모든 사물들을 당당하게 태어나게 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반쯤 떴다. 속눈썹 사이로 한 줌의 반짝이는 금속 조각들이 빛을 발했다. 따뜻한 바람에 나뭇잎들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생각했다. 나뭇잎은 나무의 허파, 허파 그 자체인 나무, 그러니까 바람은 나무의 숨결.


272p

또 나의 짦은 일생은 직선의 한 토막으로서 그 양쪽 끝은 어처구니없게도 무한대를 향하고 있어서 이는 마치 불과 몇 평짜리 마당으로는 땅덩어리가 둥근 공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97p

그래서 로빈슨은 자기도 과거에는 그들과 다를 바 없이 탐욕, 긍지, 폭력 따위의 똑같은 동기로 움직이는 존재였으며, 지금도 어느 커다란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과 같은 무리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마치 벌이나 개미, 혹은 돌을 쳐들면 볼 수 있는 기묘한 쥐며느리 떼 같은 벌래들의 무리를 관찰하는 곤충 학자처럼 객관적 거리감으 느끼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